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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상권 분석] (3)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 브로드애브뉴…한 세대만에 시골마을서 한인타운 중심지로…

뉴저지 모리스타운에 사는 주부 김현애(50)씨. 2~3주에 한번 1시간 가량 운전해서 팰리세이즈파크 브로드애브뉴를 찾는다. 가장 먼저 옆동네 리지필드의 한인마켓에 들러 장을 본 뒤, 지인들을 만나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다. 이어 비디오점을 들러 한국 드라마 DVD를 빌린 뒤 집으로 향한다. 김씨는 “남편이 타민족이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한국’과 관련된 것을 접할 기회가 없다”며 “팰팍은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곳”이라고 웃었다. 이처럼 팰팍은 뉴저지 한인들에게 쇼핑지이자 생활의 중심이다. 팰팍을 관통하는 브로드애브뉴(약 2마일)를 좌우로 90% 이상 한인업소들이 한인들을 대상으로 영업하고 있다. 더구나 ‘브로드 한인상권’의 건물의 3분의 2 가량은 한인이 소유했거나 한인이 지분을 가지고 있다. 경기침체로 대부분 힘겨운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뉴저지 최고 한인타운의 위용은 여전하다. ◇리틀이태리, 코리아타운으로 변신=팰팍은 1900년대 초반부터 대표적인 이태리계 타운이었다. 브로드상권 역시 이태리계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80년 팰팍에 한미수퍼마켓이 한인 업소로는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한식당 금호, 그랜드가구점 등이 문을 열었고 1990년대 초·중반 한인 업소들이 물밀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브로드애브뉴는 전형적인 시골 상권이었다. 극장과 자동차 딜러, 식당, 마켓 등 크고 작은 업소들이 고만고만하게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빈 가게에 한인업소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상권 자체가 바뀌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이처럼 급속한 변화의 요인으로 대부분의 한국기업 지상사가 인근에 있고 포트리보다 저렴한 리스 비용 등을 꼽고 있다. ◇복합 상권=브로드 한인상권은 그야말로 한인 업소들로 이뤄진 ‘한국 종합선물 세트’다. 팰팍상공회의소 자료에 따르면 의류 및 선물 매장이 27개로 가장 많고 미용실과 식당이 19개와 18개로 각각 기록됐다. <표 참조> 이 자료에 따르면 브로드애브뉴에 위치한 한인 업소는 모두 313개. 팰팍 내 영업을 하는 총 업소수는 500여개로 이중 90%를 한인업주들이 운영한다. ◇건물 3분의 2 한인 소유=브로드 상권이 대표적인 한인상권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상용건물 소유주의 3분의 2 가량을 한인이라는 사실도 한몫하고 있다. 본지가 입수한 뉴저지부동산협회 자료에 따르면 브로드애브뉴 선상에 있는 상용건물은 모두 135개. 이중 한인 또는 한인기업 소유는 모두 67개로 절반에 이른다. 나머지 회사 소유 상용건물 가운데 한인이 지분을 갖고 있는 경우까지 합치면 한인 소유 건물은 대략 100여개에 달한다는 게 업계의 추산이다. 강이종행 기자 [email protected]

2009-11-06

[한인상권 분석] (2)맨해튼 한인타운…맨해튼 한복판에 자리잡은 ‘한국의 얼굴’

맨해튼 32스트릿 한인타운은 타인종들에게 ‘코리아타운’으로 알려져 있다. 플러싱에도 한인타운이 있지만 맨해튼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타인종이나 뉴욕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32스트릿이 더 친근한 편이다. 대부분의 타인종들이 맨해튼 한인타운을 통해 처음으로 한식을 접할 정도로 한식 세계화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밤에는 타인종 고객들이 이곳 한인 노래방을 절반 이상 차지할 정도로 한류 전파에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다. ◇한인타운 형성=초기 32스트릿은 홈리스들이 많이 모여 범죄가 끊이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이곳에 한인타운이 형성된 것은 198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씨씨백화점과 고려서적, 현재 우리집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던 동대문식품점 등이 이곳 터줏대감이었다. 79년부터 27스트릿에서 영업을 하던 뉴욕곰탕이 82년에 32스트릿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향수를 달래려는 한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뉴욕곰탕이 이전하기 전 32스트릿에는 서울하우스가 유일한 한식당이었다. 이어 84년 강서회관, 86년 금강산 등이 속속 들어서며 한인상가도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김유봉 뉴욕곰탕 사장은 “80년대 초반에는 뉴욕 한인 동포 수가 4000여명 정도에 불과했다”며 “당시만 해도 약을 사거나 책을 구입하려면 맨해튼 한인타운으로 와야 할 정도로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한인타운이 형성되면서 한인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32스트릿이 미드타운의 요지로 부상했다. 인근에 펜스테이션 등이 있어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유동인구가 많고 메이시스백화점 등 대형 매장들이 인접해 있어 상권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뉴욕을 방문한 한국 기업 관계자나 관광객 등 한인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도 누구나 한번쯤 맨해튼 한인타운을 찾아볼 정도로 전성기를 맞고 있다. ◇전문직과 식당 성업 중=32스트릿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한 블럭 안에 모두 165개의 한인 업소들이 밀집해 있다. 이들 업소 중 가장 많은 업종이 변호사·회계사·건축사 등 전문직 사무실로 10.9%(18개)를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식당이 17개(10.3%)로 2위, 이어 병원 15개(9.1%), 여행사 10개(6.1%), 노래방 7개(4.2%) 순이다. 이외에도 부동산, 보험, 은행, 미용실 등 20여개의 다양한 업종들이 옹기종기 모여 영업을 하고 있다. 32스트릿 선상(브로드웨이~5애브뉴)의 전체 건물 중 한인 소유는 10여채로 전체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84년에 서울식품 권중갑 회장이 스탠포드호텔에 이어 H마트 건물을 사들이며 시작된 한인들의 건물 매입 붐은 불경기인 지난해에도 부동산개발업을 하는 이의근씨가 38W 건물을 6000만달러에 매입하는 등 지속되고 있다. 38W 건물은 이 일대 한인 소유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전체 면적은 10만스퀘어피트다. 나머지 건물은 미국인과 중국인 등이 소유하고 있다. ◇인접지역 비해 렌트 비싸=현재 한인타운은 인접 지역에 비해 렌트가 비싸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인 업주들이 맨해튼에서 장사를 하려면 한인타운을 찾게 되고, 그만큼 수요가 많다보니 자연스레 렌트가 오르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한 블럭 떨어진 31, 33스트릿에 비해 평균 20~30%는 비싸다는 게 한인 부동산 업계의 설명이다. 32스트릿의 렌트는 오피스가 스퀘어피트당 평균 35달러, 상가는 최소 100달러를 넘는다. 렌트가 상대적으로 높은데다 불경기가 지속되다보니 극소수 업종을 제외하고는 수익을 내기 쉽지 않다는 게 한인 업주들의 하소연이다. [인터뷰] '한류 지키는 등대 되겠다'…30여년 한자리 지켜온 김유봉 뉴욕곰탕 사장 맨해튼 한인타운의 ‘터줏대감’으로 불리는 김유봉(62) 뉴욕곰탕 사장. 76년에 이민 와 맨해튼에서 뉴욕곰탕을 오픈한 이후 지금까지 한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뉴욕곰탕이 24시간 영업을 하다보니 한인들은 그를 동포사회의 ‘등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 사장의 이민사는 맨해튼 한인타운을 그대로 대변해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타운 역사와 소식에 정통하다. "80년대초 만 해도 32스트릿은 말도 못할 정도로 우범지대였죠. 지금의 래디슨호텔이 당시에는 홈리스 구호소였기 때문에 범죄와 마약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인타운이 형성된 이후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범죄 소탕에 나서면서 한인타운도 정화되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회고. 김 사장은 “한인 이민자들의 피와 땀으로 현재의 한인타운을 일궜지만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했다. 한인 상가들이 밀집해서 영업하다보니 쓰레기 문제 해결 등 타운 입주 업소들이 해야 할 일도 많은데다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인 지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체계적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최근에는 이런 취지에 동감하는 한인 상인들이 모여 32가 상인번영회를 만들었고 김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김 사장은 “앞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한인타운의 모든 업소들이 서비스 업그레이드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권택준 기자 [email protected]

2009-10-30

[한인상권 분석] (1)유니온상가…플러싱 한인상권 1번지 ‘자존심 지킨다

금융위기가 촉발한 경기침체로 한인경제도 휘청거리고 있다. 한인상권의 등줄기로 통하는 플러싱 노던블러바드 선상 업소들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앞세워 고군분투하고 있다. 노던블러바드 한인상권의 초입에 자리잡은 유니온상가는 이제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중국 상권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100여개의 한인업소들이 밀집해있는 유니온상가를 해부한다. 유니온상가는 플러싱 한인상권의 효시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플러싱 지역을 맨손으로 일궈내며 한인 최대 상권으로 변모시킨 이민 1세대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이다. 공장과 주거지역이던 이 지역을 한인상권의 거점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유니온상가가 이 자리에 처음 들어선 것은 1983년. 중국계 개발업자 토머스 왕이 크라이슬러·셰볼레 자동차 딜러와 정비공장이 있던 자리에 상가건물을 지은 것이 그 시작이다. 왕씨는 이 자리에 3층짜리 건물 20개를 한꺼번에 지어 한인들에게 넘겼고, 한인 소유주들은 한인들에게 업소를 리스하면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연면적 2500스퀘어피트 규모로 지어진 3층 건물은 주로 1층에 상점들이, 2·3층은 사무실로 쓰여진다. 건물당 5명 내외의 세입자들이 들어와 전체 20개 건물에 100여개의 상점과 사무실이 있다. 한인이 전체 건물 중 15개 정도를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 5개 건물은 중국계가 소유하고 있다. 건물당 가격은 120만달러 선에서 형성되어 있는데 렌트는 1층 5000달러, 2층 1000달러 내외라는 것이 한인 부동산 업계의 설명이다. ◇한국의 축소판=유니온스트릿 선상에 있는 유니온상가는 노던블러바드와 37애브뉴 사이에 형성돼 있다. 100여개의 업소들이 있는 유니온상가 양쪽 끝으로 한인업소들이 이어져 상권의 중심 역할을 한다. 여기에는 식당이나 의류점을 비롯해 기원에서 만화방까지 한인 고객들이 필요한 것은 뭐든 다 찾을 수 있는 ‘한국의 축소판’이다. 가장 많은 업소는 미용실과 식당으로 각각 7개씩 분포돼 있다.<표 참조> 미용실은 티파니, 뉴맵시, 스왕, 이모션, 조아, 시승희, 사랑내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식당도 중식 동해루를 비롯해 이모네구이, 사라네집, 요고존, 명찬동, 장터, 누들하우스 등이 줄지어 들어서 있다. 의류·신발점과 마사지 업소도 각각 5개씩 있고 한인교회를 비롯해 여행사, 운전학원, 콜택시 업소들이 서로 경쟁하며 영업하고 있다. 이밖에 직업소개소, 보석상, 컴퓨터, 한의원, 화장품, 약국, 스시아카데미, 제과점, 옷수선, 보험, 회계사 등 다양한 업종이 입주해 있다. ◇조선족 진출=최근 들어 유니온상가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족 업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90% 이상 한인업소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플러싱 일대에 조선족 인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족 업소도 늘어나 유니온상가 내에만 10여개가 영업하고 있다. 이들 업소들은 주로 전통 마사지 업소를 중심으로 영업권을 확대하고 있다. 이국 땅에서 가장 그리운 고향 음식을 찾는 이들을 위해 조선족 특유의 메뉴를 갖춘 식당과 주점도 성업 중이다. 과거 한때 중국계 업소들이 한인업소들 틈새를 비집고 입주해 영업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했을만큼 한인상권이 튼튼하다는 것이 부동산 업계의 설명이다. ◇유동인구 최다=유니온상가의 최대 이점은 유동인구가 많다는 점이다. 플러싱 메인스트릿 전철역이 가깝고 인근에 공영주차장까지 있어 최대의 혜택을 누리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덕분이다. 한국산 의류 전문점 ‘남대문’의 권정자 사장은 “올해로 13년째 한 곳에서 장사를 해오고 있다”며 “한국산 의류만 찾는 단골고객 뿐만 아니라 거리를 지나다 들리는 타민족 고객들도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라고 전했다. 또 하나 이곳의 장점은 ‘원스톱 쇼핑’을 할 수 있는 명소라는 것. 생필품 구입에서부터 회계사나 운전학원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업소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학생 최성태씨는 “유학온 지 얼마되지 않아 미국의 실정을 잘 모르지만 이곳에 오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어 즐겨 찾는다”고 말했다. 플러싱에서 30년간 부동산업을 해온 홍종학 한미투자개발 대표는 “유니온상가는 초기 한인상권을 형성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해왔다”며 “지금은 거세게 밀려오는 중국 상권을 막아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터뷰] 26년 터줏대감 홍보당 유영준 사장 '플러싱 가로등 밝힌 게 한인들' "유니온상가가 들어서면서 어두웠던 플러싱 지역에 불이 환하게 켜졌지요.” 1984년 상가가 들어선 이후 26년간 한 자리에서 보석상 흥보당을 운영해온 터줏대담 유영준(57·사진) 사장은 초기 상가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유 사장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유니온상가에 남아있는 유일한 한인상인이다. “당시 한인상인들은 상인번영회를 구성해 상가의 권익을 찾는데 앞장섰다”고 회고하는 그는 “특히 상가 주변 길거리가 너무 어두워 각종 범죄가 난무하자 번영회가 앞장서서 시정부에 가로등 설치를 요구해 주변 상권을 밝히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상가가 한인 밀집상권으로 자리를 잡자 한국 언론은 물론 뉴욕타임스 등 주류언론에서도 새로운 한인상권의 부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당시에는 주목할만한 한인상권이 없었기 때문에 유니온상가가 새로운 한인상권으로 떠오르자 화제가 된 거지요. 한국이나 미국의 주요 언론에서 상가를 찾아와 인터뷰를 하기도 많이 했지요.” 유 사장은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서로 힘을 모아 권익을 찾아가며 정을 나누기도 했는데 요즘엔 옆집에 누가 있는지도 알기 힘들다”며 세태의 변화를 아쉬워했다. 1968년 뉴욕으로 이민온 유 사장은 맨해튼에서 보석상을 운영했던 아버지 유진형씨의 뒤를 이어 지금껏 보석상을 운영하고 있다. 이중구 기자 [email protected]

200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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